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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를 고르다 보면 "설정은 참신한데 내용이 따라가지 못한다"는 아쉬움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씨: 어둠의 날(SEE)」은 달랐습니다. 전 인류가 시력을 잃고 600년이 흐른 27세기라는 설정 하나만으로도 눈길이 갔는데, 막상 보기 시작하니 설정보다 인물들이 훨씬 더 강렬하게 기억에 남았습니다. 단순한 생존 드라마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는데, 저는 오히려 인간의 선택과 책임을 가장 극적으로 담아낸 작품 중 하나라고 봅니다.
600년 후 세계관 — 시력이 이단이 되는 사회
21세기, 치명적인 바이러스가 퍼지며 전 인류의 99.99%가 사망합니다. 살아남은 100만 명마저 모두 시력을 잃었고, 600년이 흐른 27세기에는 '앞을 본다'는 개념 자체가 희미한 전설이 되어버렸습니다. 이 세계관에서 가장 섬뜩했던 건 단순히 문명이 원시 부족 사회로 퇴보했다는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시력을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처형 대상이 된다는 점이었습니다. 이른바 마녀사냥꾼(Witchfinder)이라 불리는 군대가 전 지역을 순찰하며 이단자를 색출합니다. 여기서 마녀사냥꾼이란 시력을 가진 자 혹은 그 존재를 믿는 자를 제거하는 국가 공인 군사 집단을 의미합니다. 공포로 지식을 통제하는 구조인데, 역사 속에서 반복되어 온 권력의 방식과 맥락이 닮아 있어 제가 직접 보면서 불편함을 느꼈습니다.
포스트아포칼립스(Post-Apocalypse) 장르, 즉 문명 붕괴 이후의 세계를 배경으로 한 장르는 꽤 많습니다. 그런데 「씨: 어둠의 날」이 차별화되는 지점은 '시각 상실'이라는 조건 하나로 사회 구조 전체를 재설계했다는 점입니다. 전투 방식, 정보 전달, 권력 유지 방법까지 모두 이 전제 위에서 논리적으로 작동합니다. 제작비만 한화 약 1,500억 원에 달하는 만큼, 그 세계의 밀도가 화면에서 고스란히 느껴졌습니다.
- 마녀사냥꾼: 시력 관련 이단자를 색출·제거하는 국가 군사 조직
- 포스트아포칼립스: 문명 붕괴 이후의 세계를 배경으로 한 장르
- 제작비 약 1억 2천만 달러(한화 약 1,500억 원) 투입, 애플TV 플러스 오리지널
- 감독: 「헝거게임」 시리즈의 프랜시스 로렌스, 「나는 전설이다」 연출
포스트아포칼립스 드라마가 보여주는 인간 본성
극한 상황에서 인간이 어떤 선택을 하는지에 대해 "결국 이기심이 앞선다"고 보는 시각도 있는데, 저는 이 드라마를 보면서 그 답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걸 다시 확인했습니다. 배신자가 제 발로 마녀사냥꾼을 찾아가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마을을 밀고하는 장면과, 족장 바바복스가 위기 속에서도 아이들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지키려는 장면이 바로 나란히 배치됩니다.
부성애(Paternity)라는 개념, 즉 자식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과 책임감이 이 드라마의 감정적 축을 담당합니다. 바바복스를 연기한 제이슨 모모아는 기존의 근육질 액션 이미지와 결이 비슷해 보이지만, 실제로 극 안에서는 공포와 결단 사이에서 흔들리는 아버지의 심리를 훨씬 입체적으로 표현합니다. 제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조용한 연기였고, 그래서 더 오래 기억에 남았습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왕좌의 게임 맹인판이라는 수식어 때문에 정치 암투와 대규모 전투 중심일 거라 생각했는데, 핵심은 오히려 소규모 가족 단위의 감정선이었습니다. 이 지점에서 "스릴만 보고 싶다"는 분들과 "인물의 심리까지 보고 싶다"는 분들이 갈릴 수 있습니다. 저는 후자였기 때문에 오히려 더 만족스럽게 봤습니다.
드라마·영화 심리 연구에서는 위기 상황 속 집단 행동을 '응집 반응(Cohesion Response)'과 '붕괴 반응(Fragmentation Response)'으로 나누기도 합니다. 응집 반응이란 위협을 공유할 때 집단이 오히려 더 강하게 뭉치는 현상을 말하고, 붕괴 반응은 반대로 공황 속에서 구성원이 각자도생으로 흩어지는 현상입니다. 이 드라마의 알키니 부족은 두 반응이 동시에 나타나는 집단으로 그려지는데, 그게 훨씬 현실적으로 느껴졌습니다(출처: American Psychological Association).
시력 없는 세계의 전투 — 오감으로 설계된 액션
예전에 친구들과 산행을 갔다가 갑자기 안개가 짙어져서 5미터 앞도 보이지 않던 경험이 있습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느꼈던 무력감과 공포가 꽤 강렬했는데, 이 드라마의 전투 장면을 보면서 그 감각이 다시 떠올랐습니다. 모두가 맹인인 세계에서 벌어지는 전투는 소리와 냄새, 그리고 촉각으로만 구성됩니다.
청각 정찰대가 적군의 규모를 순식간에 파악하고, 향료를 넣은 위장 크림으로 아군과 적군을 구별하는 장면은 처음 봤을 때 "이렇게까지 설계했구나"라는 감탄이 나왔습니다. 반향정위(Echolocation)라고 부르는 개념이 있는데, 이는 소리의 반사를 이용해 주변 공간과 물체의 위치를 파악하는 능력으로, 실제 시각장애인들이 훈련을 통해 습득하기도 합니다. 드라마 속 인물들의 전투 감각이 이 원리 위에 서 있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프랜시스 로렌스 감독은 「나는 전설이다」와 「헝거게임」 시리즈에서도 제한된 환경 속 생존을 시각적으로 훌륭하게 풀어낸 바 있습니다. 그 경험이 이 드라마에서는 '보이지 않는 세계의 시각화'라는 역설적인 과제로 이어졌습니다. 제 경험상 이런 류의 연출은 CG보다 음향 설계가 더 중요하게 작용하는데, 실제로 이 드라마의 음향 연출은 영상 못지않게 정교합니다.
특히 바바복스가 절벽을 맨손으로 오르는 장면은 과장처럼 보일 수 있지만, "시력이 없는 대신 다른 오감이 극도로 발달한다"는 세계관의 전제 위에서는 내적 일관성이 유지됩니다. 이 부분을 "너무 비현실적이다"라고 보는 분들도 있는데, 저는 세계관의 규칙을 충실히 따른 결과라고 봤습니다.
지식과 권력 — 책 한 권이 바꾸는 세계
드라마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 중 하나는 상자 안에서 책들이 나왔을 때였습니다. 600년간 문명이 단절된 세계에서 그 책들은 나무껍질에 불과했지만, 그 의미를 아는 단 한 사람에게는 인류 전체의 유산이었습니다. 저는 이 장면이 드라마 전체에서 가장 조용하면서도 가장 강렬한 순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지식 독점(Knowledge Monopoly)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특정 집단이 정보와 지식에 대한 접근을 통제함으로써 권력을 유지하는 구조를 말합니다. 이 드라마의 케인 여왕이 지배하는 왕국은 바로 이 메커니즘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시력에 대한 정보 자체를 차단하고, 그 지식을 가진 자를 제거함으로써 체제를 유지합니다. 역사적으로도 지식 통제는 권력 유지의 핵심 수단이었다는 점에서, 이 설정은 순수한 SF이면서 동시에 현실 비판이기도 합니다(출처: UNESCO, 정보 접근권 관련 보고서).
반대로 쌍둥이 하니와 코푼이 책을 통해 지식을 습득해 나가는 과정은 교육이 개인과 집단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보여주는 서사이기도 합니다. 그 성장의 속도가 주변 어른들에게 공포로 작용한다는 점도 현실적으로 느껴졌습니다. 제 경험상 '모르는 것이 편하다'는 심리는 허구의 세계에서만 나타나는 게 아닙니다. 새로운 정보가 기존의 믿음과 충돌할 때 사람들이 보이는 거부 반응은 이 드라마 속 부족민들의 반응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시즌 전체를 관통하는 메시지는 결국 "지식은 위험하지만, 무지는 더 위험하다"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이 명제에 동의하지 않는 분들도 있겠지만, 적어도 드라마 안에서는 그 논거가 설득력 있게 쌓여 있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씨: 어둠의 날 시즌이 몇 개까지 나왔나요?
A. 총 3시즌으로 완결된 작품입니다. 시즌 1부터 시즌 3까지 현재 애플TV 플러스에서 모두 공개되어 있습니다. 시즌 2부터는 배우 다비드 디그스가 연기하는 강력한 신규 빌런 이브보스가 등장하며 세계관이 더욱 확장됩니다.
Q. 왕좌의 게임과 비교하면 어떤 드라마인가요?
A. 권력 다툼과 배신, 복잡하게 얽힌 인물 관계라는 측면에서 왕좌의 게임과 결이 닮았다는 시각이 있습니다. 다만 저는 씨가 정치 암투보다 가족 단위의 감정선과 생존 윤리에 더 집중한 작품이라고 봅니다. 취향에 따라 평가가 갈릴 수 있는 부분입니다.
Q. 맹인 캐릭터들의 전투 장면이 실제로 볼 만한가요?
A. 제가 직접 보면서 가장 놀랐던 부분이 바로 전투 연출이었습니다. CG 의존도가 높을 것이라 예상했는데, 오히려 음향 설계와 신체 연기에 의존하는 장면이 많아 오히려 몰입감이 높았습니다. 화려한 시각 효과보다 소리와 움직임 자체로 긴장감을 만드는 방식이라 호불호가 있을 수 있지만, 새로운 액션 경험을 원하는 분들께는 분명 인상적일 것입니다.
Q. 애플TV 플러스 구독 없이 볼 수 있나요?
A. 현재 씨: 어둠의 날은 애플TV 플러스 오리지널 작품으로, 애플TV 플러스 구독을 통해서만 정식으로 시청할 수 있습니다. 무료 체험 기간을 활용하면 시즌 1을 먼저 접해볼 수 있습니다.
결론
「씨: 어둠의 날」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설정의 참신함보다 그 설정을 완전히 소화해낸 연출과 인물의 힘이 더 인상적인 드라마였습니다. 포스트아포칼립스 장르 특유의 무게감에 부성애와 지식 통제라는 주제가 더해지면서, 단순한 생존물이 아닌 인간의 선택에 대한 이야기로 확장됩니다.
"설정만 좋고 내용은 별로"인 작품들에 실망하신 분들이라면, 제 경험상 이 드라마는 조금 다르게 느껴지실 가능성이 높습니다. 시즌 1을 다 보고 나면 자연스럽게 시즌 2로 손이 가게 되는 구성이라, 시간 여유가 있을 때 시작하는 걸 추천합니다. 현재 애플TV 플러스에서 시즌 3까지 전편이 공개되어 있으니, 처음부터 완주할 수 있다는 것도 장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