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비닐하우스》를 보고 나서 며칠 동안 멍했습니다. 이 영화가 불편한 건 단순히 내용이 어두워서가 아니라, 주인공 문정이 내리는 선택 하나하나가 너무 이해가 됐기 때문입니다. 사회 시스템의 가장자리에서 하루하루를 버티는 사람이 어떻게 무너지는지를, 김서형 배우는 표정 하나로 다 말해냈습니다.비닐하우스가 보여주는 사회적 배경중학교 때 같은 반 친구가 어느 날부터 점심을 혼자 먹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엔 그냥 기분이 안 좋은 줄 알았는데, 어느 날 그 친구가 생활비가 부족하다며 돈을 빌려달라고 했습니다. 그제야 알았습니다. 학교에서 아무렇지 않아 보였던 그 친구가 집에서는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었다는 걸. 제가 《비닐하우스》를 보면서 가장 먼저 떠올린 건 바로 그 친구였습니다.영화 속 요양보호사 문정도 ..
영화 「가비」는 1896년 아관파천(俄館播遷) 시기를 배경으로, 커피 한 잔 속에 독을 감추는 암살 음모를 그린 퓨전 사극입니다. 제가 처음 이 영화를 접했을 때, 솔직히 '커피와 궁중 첩보물이 어울릴까?' 반신반의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보고 나니 예상이 완전히 빗나갔습니다. 역사 속 실제 사건을 이렇게 풀어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인상적이었습니다.바리스타라는 설정, 어색할 것 같았지만일반적으로 사극 영화라고 하면 갑옷과 칼싸움, 혹은 궁중 암투 정도를 떠올리게 됩니다. 그래서 '조선 최초의 바리스타'라는 설정을 처음 들었을 때 저는 다소 억지스럽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제 경험상 이런 편견은 꽤 자주 틀립니다.영화 속 주인공 따냐는 러시아에서 자란 조선인으로, 커피 원두를 다루는 솜씨가 생계이자..
시험 기간이 길어지면 가끔 이런 생각이 듭니다. '아무리 해도 달라지는 게 없으면 굳이 이걸 계속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제가 그 무기력함을 가장 선명하게 마주친 건 영화 한 편을 보고 나서였습니다. 「칠드런 오브 맨(Children of Men)」, 2006년 개봉작인데 아이가 한 명도 태어나지 않는 2027년을 배경으로 인간의 희망이 어떻게 소멸하고 또 어떻게 되살아나는지를 담은 작품입니다.롱테이크 한 방으로 느끼는 세계의 공기일반적으로 액션 시퀀스는 빠른 컷 편집으로 긴장감을 만든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 영화를 보면서 느낀 건 정반대였습니다. 롱테이크(Long Take)란 컷 전환 없이 카메라를 계속 돌려 한 장면을 길게 이어가는 촬영 기법입니다. 쉽게 말해 편집의 힘을 빌리지 않고..
수학 시험지를 받아들고 예상보다 훨씬 낮은 점수를 확인했을 때의 그 기분, 저는 아직도 기억합니다. 분명히 나름대로 열심히 했는데 결과가 따라오지 않으면, "나는 그냥 수학을 못 하는 사람인가"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자리를 잡아버립니다. 영화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는 바로 그 감각을 정확히 건드리는 작품이었습니다. 탈북한 천재 수학자가 경비원으로 일하며 한 고등학생에게 수학을 가르치는 이야기인데, 보는 내내 단순한 영화 이상의 무언가를 남겼습니다.238등 학생과 경비원 수학자의 첫 만남주인공 한지우는 어려운 가정환경 속에서도 전국 상위 1%만 모인다는 동원고에 입학합니다. 그런데 막상 들어가 보니, 수업 자체가 고액 사교육을 이미 받고 온 학생들을 전제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학원과 과외로 무장한 급우들..
500년 넘게 매 10초마다 익사와 소생을 반복하는 존재가 있다면, 그게 과연 축복일까요. 넷플릭스 영화 「올드 가드」를 보면서 저는 내내 이 질문을 붙들고 있었습니다. 불멸이라는 소재를 단순한 슈퍼파워로 소비하지 않고, 오랜 세월이 인간에게 어떤 상처를 새기는지 정면으로 다룬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꽤 오래 머릿속에 남았습니다.불멸의 고독 — 영원히 산다는 것의 진짜 무게친하게 지내던 친구가 갑자기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간 적이 있습니다. 처음 한두 달은 연락이 이어지다가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뜸해졌고, 저는 그 허전함에 꽤 오래 적응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올드 가드」의 주인공들은 그런 이별을 수백 년 단위로 반복합니다. 제가 겪은 그 한 번의 이별도 쉽지 않았는데, 셀 수 없이 많은 이별을 반복해야 ..
2006년 개봉한 봉준호 감독의 「괴물」은 천만 관객을 돌파한 첫 번째 한국형 블록버스터 괴수영화입니다.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 저는 단순히 한강에서 튀어나온 거대 생물체와 싸우는 액션물이라고 생각했는데, 보고 나서 한참 동안 머릿속이 복잡했습니다. 이 영화가 던지는 질문이 생각보다 훨씬 묵직했기 때문입니다.봉준호가 설계한 한강 괴수영화의 구조「괴물」의 시작은 굉장히 도발적입니다. 미군 기지에서 포르말린(formalin) 같은 화학물질이 한강 하수구로 흘러 들어가고, 수년에 걸쳐 돌연변이를 일으킨 생명체가 결국 수면 위로 올라옵니다. 여기서 포르말린이란 방부 처리에 쓰이는 포름알데히드 수용액으로, 실제로 생태계 교란을 유발할 수 있는 독성 물질입니다. 영화가 현실에 단단히 발을 딛고 있다는 느낌이 든 ..
이웃이 생판 모르는 남이라고 생각했다면, 그건 아직 제대로 된 이웃을 만나지 못한 것일 수 있습니다. 소지섭이 전직 국정원 블랙요원으로 등장하는 드라마 「내 뒤에 테리우스」를 보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첩보와 액션이 뒤섞인 이야기인데, 정작 제 마음에 남은 건 복잡한 작전 전개가 아니라 옆집 이웃과 조금씩 신뢰를 쌓아가는 장면들이었습니다. 드라마를 통해 사람 사이의 관계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다시 생각해 보게 됐습니다.이웃관계, 어색함이 먼저입니다전직 NIS 블랙요원인 김본은 아파트 베이비시터로 위장해 옆집에 들어갑니다. 여기서 NIS란 국가정보원(National Intelligence Service)을 의미하며, 블랙요원은 신분을 철저히 숨기고 활동하는 비밀 공작원을 뜻합니다. 처음 두 사람..
시간여행 드라마를 보면서 "나도 과거로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한 적 있으십니까? 저는 KBS 드라마 「어쩌다 마주친, 그대」를 보다가 그 질문이 완전히 다른 의미로 다가오는 경험을 했습니다. 단순히 과거를 바꾸러 가는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이미 늦어버린 줄 알았던 관계를, 아직 늦지 않은 시점에서 다시 마주하는 이야기였으니까요. 입소문만으로 OTT 통합 1위를 기록한 이 작품이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건드렸는지, 저 나름의 시각으로 풀어봤습니다.타임슬립 설정, 그런데 이건 좀 다릅니다타임슬립(Time Slip)이란 물리적 시간의 선형 흐름을 이탈해 과거 또는 미래의 특정 시점으로 이동하는 서사 장치입니다. 여기서 타임슬립이란 단순한 과거 여행이 아니라, 이미 확정된 역사의 흐름 속에 현재인이 ..
솔직히 저는 분노의 질주를 단순한 자동차 액션 영화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22년 동안 10편까지 이어진 프랜차이즈가 왜 이렇게 오래 살아남았는지 그 이유를 제대로 따져본 적이 없었거든요. 막상 1편부터 9편까지 흐름을 쭉 짚어보니, 단순한 카 체이스 영화가 아니라 인물 관계망이 정교하게 설계된 서사 구조물이라는 걸 뒤늦게 깨달았습니다.22년 프랜차이즈가 버텨온 구조적 이유분노의 질주 1편이 개봉한 건 2001년입니다. 그로부터 22년이 넘는 시간 동안 시리즈가 이어졌고, 글로벌 누적 흥행 수익은 약 70억 달러를 상회합니다(출처: Box Office Mojo). 웬만한 블록버스터 프랜차이즈가 5편을 넘기지 못하고 소진되는 걸 감안하면, 이 숫자는 단순한 흥행 수치가 아니라 하나의 현상입니다.제가 1편부터..
저도 처음엔 그냥 학교 배경 단편 드라마겠거니 했습니다. 그런데 보다 보니 손이 멈추지 않았습니다. KBS 드라마 스페셜 《나의 가해자에게》는 학교폭력(학폭) 피해자가 13년 뒤 가해자를 직장 후임으로 만나게 되는 이야기인데, 가해자는 피해자를 전혀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 설정 하나가 저에겐 단순한 극적 장치가 아니라 현실의 어딘가를 정확히 찌르는 느낌이었습니다.가해자는 잊고, 피해자는 평생 기억한다드라마 속 3년차 기간제 교사 진우는 새로 부임한 신입 교사가 13년 전 자신을 괴롭혔던 바로 그 인물이라는 걸 직감적으로 알아챕니다. 그런데 그 가해자 성필은 진우를 전혀 알아보지 못합니다. 진우에게는 평생을 따라다닌 트라우마(trauma), 즉 심리적 외상이었던 기억이 가해자에게는 존재조차 하지 않는 셈이..